미움받을 용기2 - 사랑과 진정한 자립에 대한 아들러의 가르침 / 기시미 이치로, 고가 후미타케 지음 / 인플루엔셜 / 2016
행복이란 그 자리에 머문 채로는 향유할 수 없어.
걷기 시작한 길을 쉬지 않고 걷지 않으면 안 되네.
'사랑'은 인생 최대의 선택이다.
첫번째 이야기 '나쁜 그 사람, 불쌍한 나'라는 핑계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네.
우리가 의논해야 할 것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이것뿐일세.
'나쁜 그 사람' 같은 건 필요없어.
'불쌍한 나'도 필요 없고."
philosophia : 철학(philosolhy)의 어원으로 '지혜를 사랑한다'라는 의미가 있다.
즉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고 철학자는 '지혜를 사랑하는 자'이다.
"우리는 철학을 배울 수 없다. 철학하는 것을 배울 뿐이다."(칸트)
철학은 학문이라기보다 인생을 사는 '태도'이다.
cf) 무지의 지 : '아무것도 알지 못함'을 아는 그 자체가 진실한 앎을 얻는 근원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특징짓는 말.
교육의 목표 : 자립
인간은 모두 '자유'를 추구하고,
무기력하고 부자유스러운 상태에서 '자립'하기를 원한다.
교육은 '개입'이 아니라 자립을 위한 '지원'이다.
인간 이해 : '나'를 알고 '너'를 아는 것. 인간의 본성을 알고 이해하는 것.
'인간에 대한 존경' - 모든 타인이 존경의 대상이 된다.
"'존경'이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존재임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이란 그 사람이 그 사람답게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게 배려하는 것이다."(에리히 프롬)
'존경(respect)'의 어원인 라틴어 '레스피치오(respicio)'에는 '본다'라는 의미가 있다.
있는 그대로의 그 사람을 보는 것.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공감 : 타인에게 다가가는 기술이자 태도.
우리는 과거의 사건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에 따라 자신의 삶을 결정한다.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즈금, 여기'를 사는 나이다.
인가은 언제나 자아를 결정할 수 있는 존재다.
자신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의 나'를 포기하고, 부정하고, '지금까지의 나'가 다시는 얼굴을 내밀지 않도록 무덤에 묻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겨우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은 변하지 않으려고 한다.
우리의 세계에서는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나'라는 이야기의 편찬자이고,
그 과거는 '지금의 나'의 정통성을 증명하기 위해 자유자재로 다시 쓸 수 있다.
두번째 이야기 왜 '상과 벌'을 부정하는가.
"해야 할 일은 질책이 아니라 가르쳐주는 것이라네.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고 가르쳐주어야 하네. '존경'을 보여줌으로써.
일단은 자네가 횃불에 불을 붙이고 용기를, 존경을 보여야 하네."
교실이라는 공간의 주권자는 교사가 아니라 학생들이다.
그리고 교실의 규칙은 주권자인 학생들의 합의를 통해 제정되어야 한다.
cf) 프로이트의 '공격 욕동(aggressive drive)' : 공격성이 삶에 대한 동력으로 작용한다고 봄. 살기 위해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는 자기방어 기제가 '공격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욕동' = 욕구를 움직인다.
'문제행동의 5단계' - '소속감', 즉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위치를 확보하는 것'이라는 목적에서 비롯된다.
1단계 칭찬 요구 : '칭찬받는 것', '공동체 안에서 특권적 지위를 얻는 것'이 목적이다. / 칭찬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적절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특별'하지 않아도 가치가 있다고 가르쳐주어야 한다. '존경'을 보여줌으로써.
2단계 주목 끌기 : 야단을 맞더라도 존재를 인정받고 특별한 지위에 오르고 싶어한다. 그래서 규칙을 깨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3단계 권력투쟁 :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끊임없이 도발하고 싸움을 건다. 그 싸움에서 이김으로써 '자신의 힘'을 과시하려고 한다. / 반항
불복종을 통해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4단게 복수 : 소중한 '나'를 인정해주지 않는 사람,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에게 사랑의 복수를 한다. 정면에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가 싫어하는 짓'을 하는 것이 목적이다. 예) 자해, 스토커 : 증오, 혐오라는 감정을 통해서 어떻게든 관계를 이어가려고 함
5단계 무능의 증명 : ' 더 이상 나에게 기대하지마, 왜냐하면 나는 무능하니까.'
야단을 맞음으로써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교사가 할 일은 아이들의 '목적'에 주목하고, 아이들과 함께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다.
질책을 포함한 '폭력'은 인간으로서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커뮤니케이션이다.
분노와 폭력이 수반된 커뮤니케이션에는 존경이란 없다. 경멸을 초래할 뿐.
"분노란 인간과 인간을 갈라놓은 감정이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집착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바꿀 수 있는 것'을 직시하라.
"인간이 미성년 상태에 있는 이유는 이성이 결여되어서가 아니다.
다른 사람의 지시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결단도 용기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인간은 자기 책임하에 미성년 상태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이성을 발휘할 용기를 가져라." (칸트)
cf) 미성년 상태(미성숙 상태) : 다른 사람이 이끌어주지 않으면 스스로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
'미성년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책임지는 상태'로 들어서는 것을 말하는데 이를 칸트는 '계몽'이라고 표현했다.
교육하는 입장에 놓여 있는 사람, 그리고 조직의 운영을 맡고 있는 리더는 늘 '자립'을 목표로 내세워야 한다.
본인의 인생은, 매일의 행동은 전부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줄 것.
그리고 결정하는 데 필요한 자료 - 예를 들면 지식과 경험 - 가 있으면 제공해 주는 것, 이것이 바람직한 교육자의 자세이다.
아이들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 결정을 지지해 주고 도와주라.
그리고 언제든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알려주되
너무 가깝지 앟은, 도움을 줄 수 있는 거리에서 지켜보면 된다.
비록 그 결정이 실패로 끝난다 할지라도 아이들은 '내 인생은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세번쨰 이야기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기초하라
"공동체 감각은 '익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발굴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감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걸세.
공동체 감각이란 뜬구름 같은 이상이 아닐세.
우리 인간에게 내재된 삶의 근본 원리인 셈이지."
칭찬받는 것이 목적인 사람들이 모이면 그 공동체에서는 '경쟁'이 일어난다.
겨쟁이 있는 곳은 술수와 부정행위가 따르게 되어 있다.
누군가에게 이길 필요가 없다. 완주할 수 있으면 그걸로 좋지 않은가.
조직은 상벌도 경쟁도 없는 진정한 민주주의를 관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주주의적인 공동체는 경쟁원리가 아닌 '협력원리'에 기초해서 운영되는 공동체이다.
-> 수평관계에 기초한 '민주주의 심리학'.
인간은 처음부터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생을 시작한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경험하는 아이들은 원리적으로 열등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인간은 나약함 때문에 집단을 형성하고 사회를 구축했다.
고립된 인간은 몸의 안전뿐 아니라 마음의 안전까지도 위협받는다.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항상 타인과 강고한 '유대'를 끊임없이 갈망하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공동체 감각이 내재되어 있고
그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 욕구는 '소속감'이다. 즉 고립되고 싶지 않다.
고립은 사회적인 죽음을 뜻하고, 결국에는 생물학적 죽음과도 연결되지 때문이다.
타인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지 말고 자신의 의사로 스스로를 인정해야 한다.
'나'의 가치를 내가 결정하는 것. 바로 이것이 '자립'이다.
'특별'한 존재가 아니어도,
특별히 뛰어나지 않아도, 평범한 자신을 , '그 외 다수'로서의 자신을 받아들여라.
'남과 다른 것'에 가치를 두지 말고 '나는 나'라는 것에 가치를 둬라.
그것이 진정한 개성이다.
존경을 통해 아이들에게 있을 곳을 제시해야 한다.
행한 사람이 누군가를 구하려고 하면 그것은 자기 만족에 그치고 누구 한 사람 행복해지질 않는다.
"카운슬링이란 자립을 위한 재교육이고,
카운슬러는 교육자다. 그리고 교육자는 카운슬러다."
교사가 학생들과 맺어야 하는 관계는 '교우'이다.
네번째 이야기 주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모든 고민이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고 해서 타인과 관계를 끊으면 고민이 해결이 될까?
타인을 멀리하고 자기 방에 틀어박혀 산다고 해결이 될까? 그렇지 않다네.
인간의 기쁨 또한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네."
'행위'가 아닌 '관계'에 주목하라.
'모든 고민은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라고 말했던 이면에는
'모든 기쁨도 인간관계에서 비롯된다'라는 행복의 정의가 숨어있따.
"우리는 교우의 관계를 통해 타인의 눈으로 보고, 타인의 귀로 듣고,
타인의 마음으로 느끼는 것을 배운다."
: 교우의 관계를 통해 발굴한다. '교우'의 관계에 있어야 타인에 대한 공헌을 시도해 볼 수 있다.
일의 관계는 '신용'의 관계이고 교와의 관계는 '신뢰'의 관계이다.
일읜 관계란 어떤 이해관계, 혹은 외적 요인이 얽힌 조건이 달린 관계이다.
개인의 좋고 싫음과는 별개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다.
교우의 관계는 이해관계로 얽힌 것도 아니고 외적 요인에 의해 강제로 어울려야 하는 것도 아니다.
'이 사람이 좋다'라는 자발적 동기로 맺어지는 관계이다. 그 사람 자체를 믿는 것.
아들러가 말하는 일이란 '생존'과 직결되는 과제이다.
일의 과제란 타인과 관계 맺는 것을 전제로 한 '분업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논리적이고 상식(common sense, 공통감각)에 일치하는 답은 우리가 일하고 협럭하고 공헌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다. 생존 차원의 문제이다.
타인과 분업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을 믿어야 한다.
분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직업에 귀천은 없다.
모든 일은 공동체의 누군가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며 우리는 그것을 분담하는 것 뿐이다.
"인간의 가치는 '어떤 일에 종사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일에 '어떤 태도로 임하느냐'로 정해지는 것이다."
타인을 신뢰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타인을 존경할 수 있느냐 없느냐와 상관있다.
믿는다는 것은 뭐든지 무작정 받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타인을 믿는다는 것, 이는 뭔가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진정한 신뢰란 어디까지나 능동적인 작용이다.
'정의'란 시대와 환경, 입장에 따라는 변하는 것이고,
유일한 정의나 유일한 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은 '자신을 좋아해서' 자기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끊임없이 불안헤 시달리기 때문에 자기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소속감은 타인을 신뢰하고 교우의 관계는 맺을 때 얻을 수 있다.
프로이트의 '죽음욕동'
: '타나토스' 는 공격적인 본능, '토데스트리프는 죽음을 향하고자 하는 무의식이나 충동을 뜻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삶을 삶 욕동과 죽음 욕동의 투쟁으로 보았는데,
살기 위한 내적 욕망이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다른 생물체를 파괴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삶의 쾌락을 넘어서]
세계 평화를 위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되니
먼저 곁에 있는 사람을 신뢰하라. 그 사람과 친구가 되어라.
"누군가가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이 협력적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당신과는 관계 없습니다.
내 조언은 이래요. 당신부터 시작하세요.
다른 사람이 협럭하든 안 하든 상관하지 말고."
우리에게는 특별한 것 없는 하루하루가 시련이고, '지금, 여기'라는 일상에 큰 결단이 필요하다.
그 시련을 피해가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다.
다섯번째 이야기 사랑하는 인생을 선택하라.
"이기적으로 '나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이타적으로 '너의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닐세.
나눌 수 없는 '우리의 행복'을 쌓아올리는 것.
그것이 사랑이네. 사랑은 '나'였던 인생의 주어를 '우리'로 바꿔주지."
"사랑이란 일부 심리학자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순수하고 자연적인 기능이 아니다."
- 인간에게 사랑이란 운명에 의해 정해지는 것도 자연 발생적인 것도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쌓아올리는 것이다.
'의지력'을 발판삼아 아무것도 없는 곳에 쌓아올려야 하기 때문에 사랑의 과제가 어렵고 힘든 것이다.
'빠지는 사랑'이란 소육욕이나 정복욕과 같다. 본질적으로 물욕과 같다.
우리는 '나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분업의 관계를 맺고
'너의 행복'을 추구함으로써 교우의 관계를 맺는다.
사랑의 관계는 '나'와 '너'보다는 상위에 있는 '우리'에 있다.
사랑이란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이다.
나의 행복을 우선하지 않고,
너의 행복에만 만족하지 않는다.
우리 두 사랑이 행복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이것이 '두 사람이 달성하는 과제'이다.
사랑은 이기심과 이타심이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다 물리치는 것이다.
행복한 삶을 얻기 위해서는 '나'는 사라져야 한다.
'나약함'은 인간관계에서 강력한 무기가 된다.(예, 아기)
모든 인간은 과도하게 '자기 중심성(ego-centrism)'에서 출발한다.
'자립' : 자기중심성으로부터의 탈피
-> 아들러는 공동체 감각을(social interest) 즉 사회에 대한 관심, 타인에 대한 관심으로 해석한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함으로써 '나'로부터 해방되어 자립을 이루고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랑을 알고 나서 인생의 주어가 '우리'로 변하는 것. 이는 인생의 새로운 출발이다.
단 두 사람으로 시작된 '우리'는 공동체 전체로, 인류전체로까지 그 범위를 확대해 갈 것이다.
이것이 공동체 감각이다.
아이들의 문제행동은 '사랑받기 위한 생활양식'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타인을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어른이 된다.
사랑은 진정한 자립이다. 어른이 되는 것. 그래서 사랑이 힘든 것이다.
한없는 사랑은 쉽게 아이를 지배하는 도구로 변모한다.
모든 부모는 '자립'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내걸고 아이들과 대등한 관계를 맺지 않으면 안 된다.
받는 사람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나서서 사랑하는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하지만
사실은 무의식중에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런 보증 없이 행동에 나서고,
이쪽이 사랑을 하면 사랑을 받는 상대의 마음에도 사랑이 싹트리라는 희망에 완전히 몸을 맡기는 것이다."(에리히 프롬)
관계를 맺을 용기가 없은 사람은 '운명의 사람'이라는 환상에 매달린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결심이고 결단이고 약속이다."(에리히 프롬)
운명이란 자신의 손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사랑이란 신념의 행위이며, 신념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도 없다."(에리히 프롬)
우리는 타인을 사랑할 때마 자기중심성에서 해방될수 있다.
오직 타인을 사랑할 때마 자립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할 때만 공동체 감각에 도달한다.
"사랑하고 자립하고 인생을 선택하라."
"미래를 만드는 것은 자네일세. 망설일 필요 없어.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그것은 미래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는 증표일세.
미래가 보이지 않기에 우리는 운명의 주인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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